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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답사자료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6-26 (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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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문서

글쓴이 : 유옥분 글라라
사진 : 정채현바실리오
일시 : 2013년 5월 24일

<다블뤼 주교의 생생한 흔적이 남은 주교관을 바라보며>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서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보고이자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다.
이 집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월 11일 신리에서 1km 떨어진 거더리에서 붙잡혀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남도 보령의 수영(갈매못 해변)으로 압송돼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참수됐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그 후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됐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12월 22일에는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2013년 4월 20일에는 성 다블뤼 주교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에 대한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성 다블뤼 주교 기념관은 순교 성인들의 주요 행적을 알리고 관리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넓은 광장(다블뤼 광장),
야외성당을 지나 왼쪽 끝자락 즈음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5월 하순이지만 광장을 지나올 때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내안에 있던 모든 힘들을 짓이기는 듯 하여 시원한 음료가 간절하다.

생가 전경

어쩔 수가 없나보다 우선 앉을 곳이 먼저 눈에 들어오니…….
맞은편 의자에 앉아 목을 축이고 생가터를 바라보니
삭막했던 나의 마음속에 단비 같은 정겨움이 묻어난다.
구원을 믿는 신앙선조들의 숨결이 뜨거운 봄바람을 타고 내 귓전을 스쳐간다.
매 순간 삶이 오욕칠정에 치우쳐서 살아온 나의 생활에
성인들의 삶이 오버랩 되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주님 이제부터는 매일매일 삶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불쌍하고 아픈 이들을 위하여 땀 흘릴 줄 아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마루 오른쪽에 있는 바구니 속에는 성인 호칭기도가 들어있기에
경건한 마음으로 성인 기도를 해보았다.
순교의 피를 흘려 우리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주신
당신들의 삶에 무한 감사를 드리며
나도 당신들을 본받아 신앙의 사도가 되겠노라고…….

벽면에 걸려있는 의복과 모자는 외국인의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주로 상복을 입고 다니셨다는
외국 신부님들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주방의 모습

안쪽으로는 양념종기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쇠 솥 앞에는 아궁이에 방금이라도 불을 지필 것 같은 풍로가 놓여 있음에
'우리 주교님이 추위에 떨지는 않으셨겠구나.…….'
장작 옆에 놓여있는 상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으나
두 분의 밥그릇, 국대접, 두 개의 수저, 저분과 쪼끄마한 간장종지 비슷하게 생긴 그릇 두 개 뿐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순간인가
먹을게 넘쳐나고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는 우리는
감사가 넘쳐나기는커녕 불평이 넘쳐나니 말이다…….

순교복자 기념탑

뒤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安안또니오 주교 1845년 10월 12일 입국 (DAVELIY)
吳베드로 신부1863년 6월 30일 입국(AUMAITRE)
閔말띵신부 1865년 5월 27일 입국(HUIN)
黃루까錫斗1815년 천안 연풍 탄생 이상 네 분은 1866년(丙 寅)
3월 12일 신리에서 전교하시다가 체포 1866년 3월 30일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
孫도마 慈善 1838년 신리에서 탄생 1866년 3월 중순 덕산에서 고문 1866년 3월 31일 공주에서 순교
이상 다섯 분을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다른 19위와 함께 복자 위로 시복(施福) 1984년 위와 같이 성인품에 오르심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피 흘려 돌아가신
 
그분들의 풍전등화 같던 삶을
 
아픔 없이는 기억할 수 없기에...
 

 
가녀린 대롱을 타고
 
꼿꼿이 피어올라
 

 
우리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선조들의 피 흘림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뒤뜰에 핀 꽃 잔디

생가 뒤편에 한 무더기로 활짝 피어있다.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지지배배 떠드는 것 같다.
“자 노래합시다!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 안에 큰 나무되니 님 따·~른 그 생애 ~가
거룩하여라 영원히~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

장독대

'이 항아리들 속에서 많은 장들이 발효되어 성인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졌겠지?'

생가 뒤편 광장의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동상

21년간의 삶을 뒤로 하고 아직도 한국 교회를 위하여 하실 일이 남아 있는 듯 서계시다.

생가 뒤편으로 조성되어 있다.

생가 뒤쪽 사제관 가는 길 표지판들

‘착한 목자들의 순교’, ‘신리에 대한 선교사들의 증언’, ‘유일하게 현존하는 주교관’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내포와 신리’, ‘성 손자선 토마스 생가’

사제관 건물

작지만 큰 사람!

사제는 작지만 큰사람입니다.
그 정신은 왕가의 혈통처럼 고귀하고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은 시골의 작은 나무 같습니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 영웅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무장한 성화의 샘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용서 받은 죄인, 저 높은 곳을 향해 갈망의 기치를 드높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의 종,
권세 있는 이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허리를 숙이는 주님의 제자이고
양 떼들의 목자인 까닭에 겸허한 마음으로 손 벌려 구걸하는 자입니다.
무한한 선물의 전달자이며 영적 전쟁터의 용사이지만,
아픈 이를 돌볼 때는 자상한 어머니입니다.
주님,
제가 지혜로 충만하고 아이의 믿음을 가진 사람,
이상은 높은 곳을 향하되 현실에선 땅에 두 발을 딛는 사람이게 하소서.
항상 기쁘게 살며 고통으로 단련된 사람이게 하시고,
모든 시기심을 몰리치고 예지를 지닌 사람이게 하소서.

(오스리트리아 어느 시골 신부)
 

모든 사제들이 마음가짐이 이러할 진데 ~~~
잠시 실수와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나를 아프게 한다고
그 분들을 비방하는 일은 멈추고
그 분들의 성화를 위해 오늘도 두 손 모아 기도해봅시다.

사제관 옆 광장에 있는 모자상

모후이신 어머니
오늘도 당신은 예수님을 품에 안고 저희들을 기다리고 계시는군요?
제게 손을 펴시어 당신의 품으로 데려가시어 포근히 안아주소서!
그리하여 어머니께서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 뜻을 알게 하시어
저희들 또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엄청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순례자들을 위한 식당 건물

성당 입구

성당 건물 후면 모습

성당 앞 야외제대

‘다블뤼광장’이라 불리는 야외성당 이다 벽면에는 ‘순교자들의 부활‘이라는 대형 부조상이 설치되어있다. 이부조상은 총 세부분으로 나눠진 작품인데 , 중앙 조형물은 예수그리스도가 강복하시는 모습이, 왼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이 무덤 앞에서 성 오메트로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오른쪽 조형물은 성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위앵 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가톨릭 신문 2009년 8월 16일)

성당 전경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지이지만 이곳에서 넘쳐나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2014년 8월에 있을
아시아청년 대회 및 한국 청년대회개최지 중 한곳이라 그런지
왠지 무한한 태동이 느껴진다.
그대들이여!
일상에 젖어 나태해졌던 마음을 씻고 영적인 힘을 얻고 싶다면 신리를 찾아보세요!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성당내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127평 단층 건물로 240석 규모의 성당이다.
우선 환하다 성당 내부를 투명유리를 사용하여 내부가 밝고,
성당에 안아 바깥의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밖을 내다볼 수 있다는 점이 신리성지의 특성을 살린 것일까?
사방으로 쭉 뻗은 농토로 인하여 사방 어디든 몇 킬로 밖까지 볼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포졸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기에
다블뤼주교께서 21년간 이곳에서 사목하실 수 있었다한다.

성 위앵 신부(본명 위앵 마르틴 뤼끄:HuinMartin Luc)
민(閔)신부는 1865년 5월 27일 신리에 첫발을 내딛어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치다가
1866년 3월 30일에(주님수난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순교,
1866년 시복되시고 1984년 5월14일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심

제대 오른쪽 감실 앞에 위앵 신부님의 유해가 145년 만에 다시 신리성지로 돌아왔다!

“나는 젊어서 죽는 것도,
칼을 받아죽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저 불쌍한 영혼(조선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못하고 죽는 것이 괴롭다.“

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순교하셨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사방으로 쭉 뻗은 농토에는 한참 모내기 준비 작업 중임을
한눈에도 알 수 있음을 뒤로한 채 십자가의 길을 하노라니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성지 분위기가, 왠지 초대 우리한국교회의 모습인 듯하다.
그분들의 피 흘림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안락함과 평온함속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는 나 자신의 안일함만을 내가족의 영달만을 위하여
기도와 봉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고 있는지 깊이 고개 숙여 회개하여 본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심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일 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 김종해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中 ]

'주님! 오늘 저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저에게 주신 십자가를 감사히 지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 아직도 많은 손길이 필요한 듯 한적하다 …….

십자가의 길 중앙에 있는 성모상

하늘에서 방금 내려오신 듯~
'지극히 거룩하신 천상 여왕이시여 저희 한국교회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성지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지금까지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신리성지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위치 :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

2013년 5월 24일 유옥분(글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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